열린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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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구간 (광희문~숭례문)
구간소개
도성의 남쪽 산 목멱산을 동서로 가로 지르는 구간으로 목멱산(남삼) 정상부에서는 14세기 축성된 성벽을 볼 수 있으며, 4계절 성벽과 어우러진 다채로운 모습이 아름답다. 특히 봄과 가을에는 꽃과 단풍이 한양도성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을 만든다.
■ 개방시간 : 24시간
구간안내
광희문→천주교 신당동교회→장충체육관→우수조망명소(용산구 방향)→국립극장→나무계단길→남산공원 이용 안내센터→N서울타워–남산 팔각정(목멱산 봉수대 터)→남산 케이블카 승강장→잠두봉 포토아일랜드→한양도성 유적전시관(건립중)→안중근 의사 기념관→백범광장→숭례문
구간 주요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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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광희문(光熙門)
- 한양도성의 동남쪽에 있는 문이다. 시구문(屍口門) 또는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불리웠다. 일제강점기에 일부 무너지고 1960년대에 퇴계로를 내면서 반쯤 헐렸던 것을 1975년 원 위치에서 남쪽으로 15m 떨어진 현 위치에 중건하였다.
*광희문 바깥의 마을, 신당동의 유래 : 광희문은 시체가 나가던 시구문이다. 일반 백성들도 출입하기를 꺼리는 문이었으나 왕의 신분으로 이 문을 이용한 왕이 있었다. 인조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사가 예상보다 빨리 도성에 접근하자 광희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한편 문 밖은 노제 장소였기 때문에 무당집들이 많아 신당리(神堂里)로 불렸는데, 갑오개혁 이후 신당리(新堂里)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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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남산공원이용안내센터
- 남산 순환버스 정류장에 있던 판매시설 공간을 서울시 전반에 걸쳐 관광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시민편의 공간으로 재정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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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N서울타워
- 남산 정상에 우뚝 솟은 전망 탑으로 해발 480m 높이에서 360도 회전하면서 서울시 전역을 조망할 수 있는 명소이다. 1969년 수도권에 TV와 라디오 전파를 송출하는 종합 전파탑으로 세워졌다가 1980년부터 일반에 공개됐다. 이후 대대적인 보수를 거쳐 2005년 복합문화공간인 N서울타워로 재탄생하였다.
- *N서울타워 전망대 2층(T2)에서 서울 한양도성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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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람안내
- ㆍ관람시간- 월요일~금요일/일요일 10:00~23:00
- 토요일 10:00~24:00
- ㆍ문의 02-3455-9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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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시는길
- ㆍ주소서울 용산구 남산공원길 126
- ㆍ교통- 충무로역 2번출구, 동대입구역 6번출구 → 순환버스 2번
- 서울역 9번출구, 이태원역 4번출구, 한강진역 2번출구 → 순환버스 3번
- 명동역 3번출구, 충무로역 2번출구 → 순환버스 5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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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남산 회현자락 한양도성 유구 발굴현장(한양도성 유적전시관 건립중)
- 남산 안중근 의사 기념관 주변은 1925년 일제가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성곽을 훼손했던 곳이다. 서울시는 2013년 한양도성 보존 관리 사업의 일환으로 이 일대를 발굴했는데, 발굴 결과 땅 속에 묻혀 있던 성곽의 기저부가 매우 양호한 상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발굴 유구는 조선시대 축성 기법과 석재(石材)의 변천 과정을 알려주는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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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백범광장
- 남산의 백범광장 주변에는 백범 김구 선생 동상, 성재 이시영 선생 동상, 안중근 의사 기념관과 동상 등 항일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기념물이 많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신궁이 있던 곳으로, 일제 식민지배의 상징을 항일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대체한 것이다. 백범광장 일대의 한양도성은 일제강점기 조선신궁을 지을 때 모두 철거되거나 흙 속에 묻혔다가 최근 다시 쌓았다. 다만 지형 훼손이 심해 원형을 살릴 수 없는 구간에는 성벽이 지나던 자리임을 알 수 있도록 바닥에 흔적을 표시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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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숭례문(崇禮門)
- <국보 제1호> 한양도성의 남대문이자 정문이다. 1395년에 짓기 시작하여 1398년 완공하였고, 1448년에 개축하였다. 1907년 교통에 불편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좌우 성벽이 헐린 뒤에는 문화재로만 남았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었으나 2008년 2월 화재로 목조인 1층 약 10%, 2층 문루 약 90%가 소실되었다가 2013년 5월 복구되었다. 이때 숭례문 서쪽 16m, 동쪽 53m의 성벽을 연결하였다.
*숭례문 현판 : 현판의 글씨를 세로로 내려 쓴 이유는 숭례문을 마주하는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한 방책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달리 숭례문의 예(禮)가 사람을 바로 세우는 덕목이라서 그랬다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