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유적전시관 소개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은 2013년~2014년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난 성벽 유적을 전시하고 있다.
이 유적은 한양도성 남산 구간의 일부로 그동안 멸실된 줄로만 알았던 성벽 구간이다. 전시관이 자리 잡은 남산 자락은 한양도성의 오랜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이다. 한양도성 유적(1396)-조선신궁 배전 터(1925)-남산 분수대(1969) 등을 포괄하는 전시관 권역에서는 조선시대 축성의 역사, 일제강점기의 수난, 해방 이후의 도시화, 최근의 발굴 및 정비 과정을 모두 볼 수 있다.
한양도성 유적
전시관 일원에서는 총 길이 약 189m의 한양도성 유적이 발굴되었다. 한양도성은 조선 왕조 내내 지속적인 보수를 통해 유지되었다. 이 유적은 태조(14세기), 세종(15세기), 숙종 이후(18~19세기)에 쌓았던 부분들이 하나의 성벽을 이루고 있어 시기별 축성양식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성벽을 쌓을 때 임시로 나무 기둥을 박았던 구멍의 흔적들도 함께 발굴되었다.
조선신궁 배전 터
한양도성 남산 구간은 1925년 일본의 식민통치를 상징하는 조선신궁 건립으로 크게 훼손되었다. 이 건물지는 조선신궁 내 배전(拜殿, 방문객들이 절하며 참배하는 곳)의 기초 구조물로 성벽 발굴조사 때 함께 발견되었다. 일제가 한양도성을 철거하고 그 위에 조선신궁을 세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현장이다.
분수대
광복 이후 조선신궁이 없어진 자리에는 이승만 대통령 동상이 들어섰다가 4·19 혁명으로 철거되고 1968년부터 남산 식물원과 분수대가 자리 잡았다. 둘레 20m의 분수대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컸으며 나들이 장소로 사랑받았다. 2006년 ‘남산 제모습 가꾸기’ 사업으로 식물원은 철거되었으나 분수대 광장은 발굴 전까지 유지되었다.
방공호
일제강점기에 설치된 이 방공호는 적군의 공중 공격을 피하기 위한 방어시설이었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앞두고 일본은 경성(현재의 서울)에 1만 개의 방공호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건설을 추진했다. 입구 계단을 내려가면 약 33㎡의 방과 긴 통로가 있는데, 관람객 안전을 위해 내부 관람은 제한하고 있다.
각자성석(글자를 새긴 성돌)
축성과 관련된 글자를 새긴 돌이라는 뜻이다. 천자문 순서로 표시된 축성구간 명칭(14세기), 축성 담당 지방(15세기), 공사 관계자의 이름(17세기 이후) 등을 새겼다.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내자육백척(奈字六百尺)’ 각자성석은 14세기의 것으로 이 구간의 명칭이 천자문의 60번째 글자인 ‘내(奈)자’였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