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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소식] 피 흘려 지켜온 230년...한국 천주교 역사 여기 모였네(사진첨부)

	    		

* 날 짜 : 2014.08.07 (목)

* 출 처 : 중앙일보

        

서울역사박물관, 유물 450점 전시 

 
'서소문·동소문 별곡' 오늘 개막
 

   
신유박해 때 쓴 '황사영 백서' 등 교황청 소장품 5점도 서울 나들이
 

     

‘서소문·동소문 별곡’전에 출품된 유물들. 위로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① 신문 1개면 정도 크기의 흰 비단에 1만3311개의 글자를 쏟아낸 황사영 백서(1801). 청의 군대 파병을 요청한 부분 등은 그동안 논란이 돼왔다. ② 김대건 신부의 유골함(1901). 가톨릭대학교 전례박물관 소장. ③ 서울 동소문 백동수도원이 설립한 한국 천주교 최초의 실업학교인 숭공학교에서 만든 백동수도원 현관문. ④ 다산 정약용의 십자가. 남양주 정약용 묘에서 발굴됐다.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아, 죽은 자들은 이미 목숨을 던져 진리를 증명하였으니… 산 자들은 양떼가 흩어져 달아난 것처럼 산골짜기로 도망쳐 숨고 길에서 헤매며 숨죽이고 있습니다… 금년의 박해는 끔찍했습니다. 인간이 어찌 이처럼 극단에 이를 수가 있겠습니까.”(김훈 소설 『흑산』 중)

 황사영(1775∼1801)은 옹기가마 속 토굴에서 흰 비단(帛書·62×38㎝)을 펼쳐 1만3311개의 한자를 빼곡히 써내려갔다. 그는 정약용의 조카 사위로 신유박해(1801·한국 천주교회에 처음으로 가해진 대대적 박해)를 피해 충북 제천, 지금의 배론 성지에 은신하고 있었다. 중국인 주문모 신부와 신유박해 순교자 30여 명의 순교열전, 신앙의 자유를 구할 방안 등을 적었다. 밀사편에 베이징에 보내 외세의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간절한 말들은 토굴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황사영이 체포되면서 백서는 의금부에 압수됐고, 1894년에야 서울의 뮈텔 대주교에게 전달됐다. 조선 순교자 79위 시복식이 있던 1925년 로마로 보내져 바티칸 민속박물관에 소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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