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열린마당 |

새소식

[보도자료] [세계유산 한양도성] 수도 서울 600년 역사, 도성 곳곳에 흐른다

	    		

[한양도성은 서울의 옛 도심을 에워싸고 있는 성곽뿐만 아니라 성곽으로 둘러싸인 수도의 도시공간을 아우른다. 조선 태조가 1396년 내사산인 백악, 남산, 낙산, 인왕산 능선을 따라 성곽을 완성하면서 한양은 조선의 수도로서 위상을 갖추게 됐다. 60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한양도성은 도심의 고층빌딩과 어우러지면서 현대와 전통이 조화를 이룬 서울의 상징이 되고 있다. 1904년 찍은 국보 1호 숭례문의 모습(위쪽 사진)과 서울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한양도성 성곽. 서울시 제공]

 

세계적으로 천만이 사는 대도시에서 서울만큼 거대한 성곽이 남아있는 경우는 드물다. 현존하는 세계 도성 중 최대 규모인 한양도성은 전체의 70%가 옛 모습에 가깝게 정비되어 있다. 늘 가까이 있어서인지 우리는 한양도성의 문화유산 가치를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한양도성은 서울이 역사문화도시로서 위상을 확고히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세계 도성 중 가장 규모가 큰 한양도성 

한양도성(Seoul City Wall)은 조선왕조가 1392년 건국되고 2년 후 도읍지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면서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외부 침입으로부터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성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514년) 도성 기능을 수행했을 만큼 견고하게 지어졌다. 

한양도성은 1396년 백악(북악산), 낙타(낙산), 목멱(남산), 인왕산의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성벽을 축조한 이후 여러 차례 개축하고 보수했다. 평균 높이는 5∼8m, 전체 길이는 약 18.6㎞에 달한다. 성벽 외에 4대문(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과 4소문(혜화문, 소의문, 광희문, 창의문)이 있다. 또 도성 밖으로 물길을 잇기 위해 흥인지문 주변에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을 두었다. 

태조 이성계는 한양천도 후 1395년 본격적으로 성곽을 축조하기 위해 도성조축도감을 두고 이듬해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내사산의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기 시작했다. 

실록에 의하면 성벽을 처음 축조할 당시 산지와 구릉지에는 석성을 쌓고 평지에는 토성을 쌓았다고 한다. 특히 지대가 낮은 지역에는 돌로 기초를 다진 뒤 축성했다. 이후 한양도성은 여러 차례 고쳐 쌓는 공사를 통해 토축 구간이 석성으로 개축되어 세종대 이후에는 전 구간이 석성으로 바뀌었다. 

태조 때 한양도성 공사는 1396년부터 1398년까지 약 3년간 진행됐다. 이어 세종 4년(1422년) 일부 무너진 구간을 보수하고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는 대규모의 수축공사가 시행됐다. 이때 돈의문을 새로 만들어 지금의 신문로(新門路)가 생겨났다. 

17세기 이후에 형성된 한양도성의 방어 전략은 대대적인 도성의 수축공사로 나타났다. 대표적으로 숙종 연간 1704년부터 1710년까지 장기적인 도성 수축공사가 진행됐다. 이후에도 영조연간(1724∼1776), 정조연간(1776∼1800), 순조연간(1800∼1834), 고종연간(1863∼1907)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전 기간을 거쳐 크고 작은 성곽 수축공사가 이어졌다. 

한양도성은 근대기 도시계획과 시가지 팽창, 근대 교통시설의 도입, 주거지 형성 등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특히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과 급격한 도시화, 산업화를 겪으면서 훼손이 가속화됐다. 1907년 일본은 자국의 왕세자 방문을 계기로 길을 넓힌다는 미명하에 성벽처리위원회를 통해 숭례문의 북측 성벽을 철거했다. 1914년 소의문, 1915년 돈의문이 철거되고 이후 한양도성의 서쪽과 동쪽 성벽이 훼손되거나 철거됐다.

한양도성의 복원은 1960년대부터 시작됐다. 1962년 한양도성의 성문인 숭례문과 흥인지문이 각각 국보1호와 보물1호로 지정되었고 1961년부터 숭례문에 대한 해체 보수가 있었다. 본격적인 복원공사는 1968년 북한의 무장공비가 서울로 침입한 1·21사건을 계기로 1975년부터 1981년까지 청와대 주변 삼청지구를 시작으로 총 7개 지구로 나눠 진행됐다. 1990년대까지 행해진 복원과 보수 작업은 2000년대 들어 발굴사업으로 이어졌고 성곽유적 발견 등 발굴사업으로 얻은 성과는 한양도성의 복원 방향과 가치를 재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울의 위상 높인 한양도성 

한양도성은 역사문화도시로서 서울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한 문화유산이다.

송인호 서울역사박물관장은 23일 한양도성이 갖는 유산가치로 수도 서울의 600년 역사층위(Historic Layering)가 몸에 새겨져 있는 도시유산이라는 점을 꼽았다. 

조선왕조 전 기간 동안 시기별 축성과정과 관리방식, 축조형태와 수리기술, 성벽에 새겨진 각자성석과 함께 특출한 역사적 증거가 잘 보존돼 있다는 것이다. 다른 국가의 역사도시 성곽을 보면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산업혁명과 시민혁명, 도시개발을 겪으면서 대부분 해체되었지만 한양도성은 전체 18.6㎞ 구간 중 13.1㎞가 국보와 보물, 사적으로 보호돼 왔다. 

송 관장은 또 한양도성이 지형과 일체화된 형태를 이루고 있는 건축기술의 총체로서 가치가 있다고 설명했다. 한양도성은 자연과 한 몸이 된 특별한 인공 구조물이다. 산지구간에서 도시구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암반구간에서 물길이 관통하는 낮은 구간에 이르기까지 지형조건과 도시조직에 따라 대지와 일체화된 다양한 축조기술을 보여준다. 

또 거대도시 서울 도심을 에워싸면서 도시성곽을 따라 자연풍경, 군사지역, 그리고 도시 일상공간이 성곽 원형과 유적, 기억과 함께 독특한 도시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이와 함께 한양도성은 각 성문에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새겨 넣어 백성이 문을 드나들 때 그 정신을 마음에 새기도록 했다. 유교철학을 바탕으로 국가를 경영하려 했던 조선왕조의 이념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아울러 조선후기에 유행했던 순성놀이에서 보듯 한양도성은 백성들의 삶의 터전이었고 문화예술 생활의 토대였다는 점도 문화유산 가치를 높이는 요소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유산 가치를 인정받아 2012년 11월 23일 한양도성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등록에 등재됐다. 서울시는 2017년 세계유산 공식 등재를 목표로 현재 한양도성 정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각자성석(刻字城石)에 얽힌 이야기  


책임·감독자 이름 돌에 새겨 성 축조한 뒤 무너지면 처벌
 

한양도성은 요즘으로 치면 공사실명제가 적용된 대공사였다. 성곽은 처음 축조할 때부터 구간별로 책임자를 정해 부실 공사로 드러나면 엄벌에 처하거나 다시 짓게 하는 ‘책임시공’을 원칙으로 했다.

그 증거가 ‘각자성석(刻字城石)’이다. 각자성석은 돌에 공사를 담당한 책임자나 감독관, 석공의 이름 등을 새겨둔 성돌로 현재까지 274개 이상이 발견되었다. 

세종 3년(1421년) 기록을 보면 성을 허술하게 쌓을 시 받게 될 처벌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단단하게 쌓지 아니한 자는 감독과 제조와 수령 및 총패와 두목이 모두 중죄를 더할 것이며 만일 고쳐 쌓은 뒤에 무너지게 되면 처음에 쌓던 관원을 시켜 다시 쌓도록 지시한다’고 돼 있다. 실제로 세종 6년(1424년) 함길도 북청부에서 맡아 쌓은 부분이 무너졌는데 공사를 했던 사람들을 다시 서울로 불러 쌓게 했다고 한다.

시대별로 각자성석에 새긴 내용도 다르다. 태조대에는 ‘천자문 자호’와 ‘소구간을 표시하는 숫자’를, 세종대에는 ‘군·현의 이름’을 새겼다. 조선 후기에는 ‘공사 시기·담당 군영명·공사 책임자 및 감독자’ 등을 새겼는데 성돌에 책임자의 이름을 처음 새기게 한 것은 광해군 때였다. 이러한 각자의 시기별 특징을 통해 한양도성의 구간별 축성시기를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예천시면, 울산시면, 함안시면, 의녕시면 등 지명들이 새겨져 있는 성벽도 있다. 그 지역에서 징발된 백성들이 공사를 했다는 증거다. 

궁궐을 짓는데 동원된 지역을 제외한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평안도, 함경도 백성을 주로 징발해 공사를 맡겼다. 하지만 큰 수축이 있었던 세종 때에는 궁궐 건축으로 열외됐던 경기도, 충청도, 황해도에서도 인부를 징발했다.

공사구역은 천자문 글자를 하나씩 붙여서 구분했다. ‘천(天)’자로 시작해 ‘조(弔)’자에서 끝났으니 총 97자, 즉 97구역이었다. 북쪽 9개 구간은 함경도, 동북쪽 8개 구간은 강원도, 동쪽과 남쪽 등 41개 구간을 경상도, 서쪽 15구간은 전라도, 서북쪽 24구간은 평안도가 맡았다.  

김재중 기자 jjkim@kmib.co.kr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608820&code=13220000&cp=n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