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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낙타의 등 닮은 낙산 서울 야경 1번지로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612078&code=13220000&cp=nv

 

지칠 줄 모르던 폭염의 기세도 꺾이고 어느새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그동안 푹푹 찌는 더위에 미뤄뒀던 운동을 다시 시작한다면 한양도성길 걷기를 권한다. 도심에서 가깝고 대중교통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다. 한양도성길은 총 18.6㎞이며 크게 백악구간, 낙산구간, 남산구간, 인왕산구간으로 구성돼 있다.

‘반쯤 핀 모란꽃’ 백악 

창의문에서 시작해 청와대 뒷산인 백악을 넘어 숙정문을 지나 혜화문에 이르는 백악구간은 한양도성의 주산인 백악(북악산, 342m)을 품어 전망 좋은 곳이 많다. 산세가 ‘반쯤 핀 모란꽃’에 비유될 만큼 아름답다.

1968년 1·21사태 이후 40년 가까이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다가 2007년부터 시민에게 개방됐다.

창의문은 인왕산과 백악이 만나는 지점에 있다. 흔히 ‘자하문’이라고 부른다. 사소문 중 유일하게 조선시대 문루가 남아 있다. 이 문루는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던 것을 영조 17년(1741년) 다시 세운 것이다. 인조반정 당시 반정군이 이 문으로 도성에 들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이 문루에 걸려 있다.

백악마루는 한양도성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해발 342m에 있다. 이곳에 서면 경복궁에서 여의도 63빌딩, 남산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백악마루에서 청운대로 내려가는 길에 있는 1·21사태 소나무는 수령이 200년 정도 된 나무인데 15발의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 이는 1968년 1월 21일 청와대를 습격하려 침투한 북한 특수부대원들과 우리 군경이 교전한 흔적이다. 

숙정문은 한양도성의 북대문으로 처음에는 숙청문(肅淸門)이었으나 숙정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76년 문루를 새로 지었다. 

‘낙타의 등’처럼 생긴 낙산 

혜화문에서 낙산을 지나 흥인지문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낙산(121m)은 서울의 좌청룡(左靑龍)에 해당하는 산으로 내사산 중 가장 낮다. 낙타 등처럼 생겨 낙타산, 타락산이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이 구간은 경사가 완만하여 산책하듯 걷기에 좋다. 

낙산공원 동남쪽 성벽을 끼고 있는 장수마을은 한국전쟁 전후에 형성된 판자촌에서 기원한다. 60세 이상 노인 거주인구가 많아 장수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마을 재생사업으로 주민들이 직접 집을 단장하고 골목길을 정비해 산뜻하고 깔끔한 모습으로 변했다. 

장수마을에서 암문을 통해 도성 안으로 들어가면 낙산공원 놀이광장이 나온다. 낙산공원은 ‘서울의 몽마르뜨 언덕’이라고 불리며 이곳에서 바라보는 노을과 야경은 특히 아름답다. 

이화마을은 낙산구간 성벽 바로 안쪽에 있어 도성 안에 형성된 옛 마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2006년부터 정부 지원하에 예술가들이 건물 외벽에 그림을 그리고 빈터에 조형물을 설치하면서 마을의 이미지가 밝고 화사하게 바뀌었다. 

도성을 따라 걷는 길은 대부분 성 안쪽에 조성돼 있어 어깨 높이 정도의 여장만 보이는데 낙산 구간은 성 바깥에서 걸을 수 있어 한양도성의 웅장함을 맛볼 수 있다. 낙산공원에서 흥인지문 방향으로 내려오면 옛 동대문교회 터에 한양도성박물관이 있다. 

거대한 바위들이 즐비한 인왕산 

돈의문 터에서 시작해 인왕산을 넘어 윤동주 시인의 언덕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해발 339m인 인왕산은 서울의 우백호(右白虎)에 해당한다. 치마바위, 선바위, 기차바위 등 기암괴석이 많다. 인왕(仁王)은 불교식 이름으로 무학대사가 이 산을 주산으로 삼으면 불교가 융성할 것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강북삼성병원 입구쪽에 돈의문이 있었는데 1915년 일제가 전차를 개통하면서 이 문을 허물어 건축자재로 매각했다. 현재 돈의문 터에는 공공미술품 ‘보이지 않는 문’이 설치돼 있다. 

이 구간에는 딜쿠샤(테일러 가옥)와 홍난파 가옥이 있다. 딜쿠샤는 미국인 금광 기술자로 UPI 서울특파원을 겸하면서 3·1운동을 세계에 알렸던 앨버트 테일러가 짓고 거주했던 서양식 건축물이다.

수성동 계곡은 청계천 지류인 옥류동천의 발원지로 커다란 바위 사이로 흐르는 물소리가 그윽하고 아름다워 수성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인왕산 자락 서쪽 끝에는 윤동주 시인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언덕이 있다. 언덕 위에 그의 대표작 ‘서시’를 새긴 커다란 시비가 있고, 언덕 아래에는 윤동주문학관이 자리하고 있다.

일제의 상처를 딛고 제 모습 찾은 남산 

장충체육관 뒷길에서 시작해 남산공원을 지난 숭례문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남산(목멱산, 해발 270m)은 서울의 안산(案山))에 해당해 조선 초기부터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비는 국사당을 두었다. 또 정상에는 변방의 변란을 알리는 봉수대를 설치해 궁궐에서 직접 살필 수 있게 했다. 

1921년부터 일제가 남산 중턱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주변 성벽을 대부분 파괴했으나 1970년대 이후 성곽 보존·정비사업과 1990년대 중반 남산 제모습 찾기사업을 통해 옛 모습을 상당 부분 회복했다. 이 구간에 백범광장과 안중근의사기념관 등 독립투사들을 기리는 공간이 많은 것도 일제 상흔이 깊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장충체육관 뒷길에서 서울신라호텔 뒤 남산의 동쪽 능선을 따라 조성된 나무계단길 옆에는 태조때 축조한 성벽이 당시 모습을 유지하며 길게 이어져 있다. 남산공원 백범광장에서 일부 복원된 성벽을 따라 회현동 방향으로 내려오면 한양도성의 관문인 숭례문을 만날 수 있다. 

 

▨ 알고 보면 재미있는 성곽 구조 

세종땐 장방형 쌓고 잔돌 끼워… 숙종·순조땐 돌 규격화해 축성
 

한양도성의 성벽은 기저부와 체성부, 여장부로 구분된다. 

기저부는 최하단부의 박석과 기저석을 말한다. 

성벽의 몸체에 해당하는 체성부는 구간별, 시기별로 차이를 보인다. 태조때 성벽은 자연석을 거칠게 가공해 아래쪽에는 넒은 돌을 쌓고 위쪽으로 갈수록 작은 돌을 사용해 조금씩 들여쌓는 방법을 썼다. 세종때는 석재가공을 많이 해 아래쪽에는 장방형(직사각형)으로 된 돌을 쌓았고 사이사이에 잔돌을 섞어 쌓았다. 숙종과 순조때는 정방형(정사각형)에 가깝게 돌을 규격화해 축성했다. 

여장부는 성벽의 체성위에 낮게 쌓은 담장이며 그 위에 올려놓은 지붕돌이 옥개석이다. 여장에는 3개의 구멍이 있는데 양쪽 끝에 있는 것은 멀리 있는 적을 공격하기 위한 ‘원총안’이고 가운데 구멍은 가까운 적을 공격하기 위해 뚫어놓은 ‘근총안’이다. 원총안은 구멍을 수평으로, 근총안은 아래쪽으로 향하게 뚫었다.

적을 방어하기 위한 부대 시설로는 곡장과 치성, 옹성이 있다. 성곽 일부를 밖으로 둥그렇게 돌출시켜 쌓은 것이 곡성이고 각이 져 있는게 치성이다. 곡성은 백악 동측과 인왕 서측에 2곳 조성돼 있고 치성은 흥인지문에서 광희문 사이에 5곳이 있었다. 2008년 동대문디자인플라자 건립부지 내 발굴조사 과정에서 치성의 하부 기초시설 유구가 1곳 발견되었고 그 일부가 복원되었다. 옹성은 성문을 에워싼 반원 또는 사각 형태의 성곽시설이다. 한양도성에는 흥인지문에만 있으며 반원모양이다. 

암문은 대문과 소문 사이에 누각없이 만들어 놓은 비밀문으로 총 8개가 있다. 

김재중 기자 jjkim@kmib.co.kr